티스토리 툴바


 정책에 대한 정의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둘째는 '정부가 하기로 혹은 하지 않기로 결정한 모든 것'(T.R.Dye)이라는 것이다. (...) (노시평 외, 정책학의 이해, 비앤엠북스, 2007, p.18)

 그의 정의는 정책을 상관적으로 보도록 해준다. 말 그대로 정책은 정부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가를 한 눈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정부에 의해 의미 있고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고, 반대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정부에 의해 의미 있거나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 결국 정부가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엇을 하지 않는가도 중요한데, 이는 곧 정부, 그리고 그 정부가 대표하고 있는 국가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는 특히 민간영역과의 관계를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2012), 2011 공예백서 선행연구, 38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delipot

서울 시립미술관 2011.9.16-11.6
시티-넷 아시아 2011 전 (미술관 홈페이지 소개 페이지 링크)


<시티-넷 아시아 2011>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올해로 5번째 전시라고 한다. 최근 '아시아'로 불러온 인접국가들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아시아의 현대미술전이 열린다고 해서 찾아가봤다. 
평일인데다 '예쁘지만은 않은' 현대미술전이라 그런지 관람객도 별로 없고 미술관 전체가 썰렁했다. 재미가 없나.. 하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전시들이 많았다. 한국 서울을 비롯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태국의 방콕, 일본의 가나자와에서 활동하는 작가집단 혹은 미술관에서 참가하여 각 나라별로 공간을 차지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설치 작품과 미디어 작품이 많더라. 

특히 일본과 인도네시아의 전시가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온 '21세기 가나자와 현대 미술관'은 올해 3월의 대지진을 주제로 재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새로운 '일상'과 맞닥뜨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본질적인 잘못을 저질렀는지(혹은 저지르고 있는지)에 관한 두 문제와 직면"하게 되면서 "윤리와 규범을 재정립"해야 하는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여전히 착찹하고 고통스럽고 힘들다."(소개말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폐허가 된 유치원(추정) 안에 마치 우주인처럼 방사능 보호복을 입은 조사원(이겠지?)이 잔해 중 하나인 인형을 들고 있는 사진이다. 부서진 피아노, 나뒹구는 인형들, 파스텔 톤으로 꾸며졌겠지만 이제는 더럽고 망가진 벽이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생활 공간이 아니라 우주 공간과 다를 바 없는 다가갈 수 없는 제3의 공간이다. 이 사진 한 장도 충분히 의미심장하지만 사실 이보다 더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진 바깥에 있었다. 사진 속 벽 위에 마치 진짜 해처럼 웃고 있는 노란 햇님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진 속 햇님과 똑같이 생긴 햇님 플라스틱 조명이 사진 밖 전시장 벽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환하게 일정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마치 당장 이곳도 사진 속 유치원처럼 순식간에 폐허로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저 햇님을 보고 있었던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비영리 작가 단체 '루앙그루파Ruangrupa'는 자카르타의 재앙상황(여기도 2006년에 지진이 있었는데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재앙은 이 지진을 말하는 것같다. 확실히 확인하고 오지는 못했네)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난개발 속에서 지속되는 시장의 모습들을 재현하고 있었다. 재난 상황에서 집을 대신해주는 천막들, 온갖 상자들, 평상들 같은 것이 미술관에 직접 설치돼 있었고(홍수나면 한국의 뉴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이재민의 모습들), 시골 곳곳에 영화를 상영해주기 위해 직접 개발한 자전거+영사기가방도 있었다! 중국집 배달부가 한 손에 철가방을 들고 오토바이를 모는 것처럼, 자전거 옆에 철가방 사이즈의 선반을 달아 프로젝터와 dvd플레이어를 싣고 다니며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아구스 누르 아말이라는 동네 엔터테이너를 다룬 작품이었다. 한국에서 60, 70년대에 장이 서면 광대나 각설이들이 와서 엔터네이너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이 사람도 인도네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인형극이나 만담, 토크쇼 등을 하는 인기 스타인 것 같다(페이스북도 하길래 친구요청했다!). 그가 사용하는 다양한 소품들도 완전 재미있는데, 모아두면 쓰레기로 착각할 수도 있을만큼 다양한 잡동사니들, 예를 들어 망가진 서양 아기 인형, 그에 맞는 낡은 플라스틱 욕조, 나무판대기로 만든 물고기, 화장실에서 쓰는 큰 플라스틱통(쓰레기 모아두는..) 뚜껑, 나무에 물감으로 직접 그린 남자 여자 가면, 망가진 우산 등 수많은 것들이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이 잡동사니들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그가 동네 어귀에서 인형극을 벌이고 있는 영상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해가 진 저녘무렵, 족히 100명은 돼 보이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그의 극을 보기 위해 동네 공터 어딘가에 모여 있다. 그는 가로 세로 1미터쯤 돼는 나무로 만든 정육면체 안에 들어가 "티비 안에는 사람이 없지만 이것이 진짜 3D TV지~"라면서 웃기는 노래를 좀 하다가 인형극을 시작했다. 그는 30cm쯤 되는 과자상자를 들고 그것이 미국의 WTC 빌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황급히 물고기 모양 판자를 찾더니 가운데에 막대를 찔러넣어 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렇다. 오사마 빈 라덴의 비행기다. 비행기를 한 손에 쥐고 "비행기가 빌딩에 떨어졌고 큰 불이 났지요! 팡!" 붉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그는 뒤이어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았어요. 오사마 빈 라덴은 어디있나? 바로 여기 있지!"라며 오사마 빈 라덴 인형을 내놓았다. 빈 라덴은 '춤추는 짱구'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흔들흔들 춤을 추는 인형이었다. 마치 짱구가 빈 라덴의 얼굴을 하고 군복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가 조종하는 물고기 비행기는 춤추는 빈 라덴을 공격하고 총을 쏘았다. 그러나 총을 맞아도 빈 라덴을 쓰러지지 않았다. "빈 라덴은 계속 춤을 췄어요." 그가 "댄싱댄싱"이라고 말하자 다들 웃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인이 다수인 이슬람 문화권의 국가다. 이 곳에서 9.11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미국, 중동, 그리고 한국과도 많이 다를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아말의 대사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문화권인 국가로서 오사마 빈 라덴을 포함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과 같은 문화(그리고 믿음)를 갖고 있지만 매우 친밀한 관계는 아닌 듯 보였고, 또한 미국과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 영상 속에서 9.11을 재현하는 방식은 나에게 낯설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미국과 중동과 이외의 제3의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그것도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웃기는 광대가 9.11을 재현하는 방식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1만명 죽었다"라는 대사를 듣고도 아이들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먼 공간의 일이니 그냥 웃고 마는게 자연스러운 것일까? 이런 인도네시아 사람들읜 반응은 미국과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한국의 한국인들에게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흥미로웠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 영상이 빈 라덴이 사살당하기 이전인지 이후인지 궁금해서 미술관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2010년 작품이다. 빈 라덴 사살이 올해 5월이었으니 지금은 또 그가 어떤 말을 할지도 궁금하다. 

내가 보기엔 전시물들이 다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그런대로 재미있었는데, 미술관 측에서는 전시에 대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준비도 좀 대충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 프로그램을 대신하는 팜플렛에는 통상적인 전시 설명만 있을뿐 작품 사진은 엄지손가락 만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작가들의 이름도 너무 작게 표기돼 있다. 그냥 보기 좋은 팜플렛을 만들려고 한 정도. 전시장에 붙은 네임택(?)은 반대로 작가의 이름에 비해 작품 제목이 너무 작게 표시돼 있어 정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태국 작가들의 작품 몇몇에는 네임택도 안 붙어 있던데 이건 일부러 그런거겠지(-_-). 위의 링크한 홈페이지에도 설명이나 사진이 부족해 보인다. 
어쨌든 추워질 때까지 하니까 가서 한번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괜찮은 전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delipot

요즘 논문을 쓰고 있는 시즌이다보니 자연스럽게(혹은 어쩔 수 없이) 지도교수님의 지적이나 잔소리, 특강, 지도 등을 많이 듣고있는 중이다. 제자들을 방목하기로(=방관) 유명한 나의 지도교수님은 2년 전부터 제자들의 졸업을 종용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주최하고 계신다. 모임에서는 한 두 명의 제자들이 자신의 페이퍼나 논문 주제 등을 가져와서 발표를 하고, 교수님 외 다른 제자들이 서로 조언하거나 토론을 한다(그리고 끝나고는 밥과 술을 먹으러 간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적과 조언을 하는 것은 교수님이다.

근데 이 모임이 거듭될 수록 나와 다른 제자들이 느끼는 것은, 제자들의 글 솜씨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교수님의 글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거나,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등의 가르침을 주는 과정에서 오히려 교수님이 가장 많이 배우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 글을 쓸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남의 글을 통해서 발견하고, 또 자기가 한 지적을 기억하고 자신의 글에 반영하는 것이지. 이건 대학생들이 과외를 할 때 정작 가르치는 자신이 수업내용을 이해하며 '아 이런 것이였군!'하고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난 내가 영어 가정법을 가르칠 때 가장 확실히 이해한 것 같다-_-.

올해 환갑을 맞으신 지도교수님은 워낙 좋은 글을 많이 쓰시고 활동도 많이 하셔서 나에게는 항상 존경의 대상이다. 그런 교수님이 이제 글 솜씨조차 더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다니, 정말 나이가 많다고 사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환갑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결코 적은 나이도 아니란 점에서 이 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글이 좋아진다거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생산해내는 다양한 말과 글을 접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한편, 우리 엄마를 포함한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들을 보면 50세만 되어도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는 생각이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가사와 육아라는 엄청난 난관을 거쳐왔으니 휴식을 취할 시기인 것은 맞다. 그러나 단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50세 남자와 가사에 전념하는 50세 여자가 개인의 성장에 얼마나 가치를 두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사회적으로 50세의 남자는 한창 자기의 일을 발전시킬 나이이지만, 가사와 육아를 중점에 뒀던 50세 여자는 앞의 남자보다는 정적인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게 너무 단적인 예시이고, 또 대부분의 여자들이 어떤 형태이든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좋지 않은 비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소위 '전업주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우울해 하거나 반대로 가족의 부양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다보니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긍정적 발전이나 계발을 남자에 비해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우는 있다(이것도 사회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즉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을수록 사람이 인격적, 능력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남자든 여자든 작은 관계 속에서만 고립돼 있으면 그 상태에 만족하고 그것에 문제가 있더라도 고착되기 쉬운 것이다. (여기서의 능력계발이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뭐든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능력계발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뿐만 아니라, 뭔가 업무나 공통된 주제, 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그러다가 충돌도 일어나고 그런 갈등도 풀어가는 과정은 때로 혼자서만 인격을 수양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가사일을 하는 여자의 예가 아니더라도 고립된 사회관계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좋지 않다는 예는 많다. 초, 중학교에서 학생과 주변 동료들 사이에서만 생활하는 교사는 '꽉 막혔다'는 평가를 듣기 마련이고(사회적 편견이겠지만), 은퇴 후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노인들도 고집을 내세운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결국 나이가 적든 많든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을 때 사람들은 인격이든 능력이든 한계를 벗어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공부조차 머리를 맞대면서 하는 게 더 많은 것을 터득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혼자서 침잠해야 할 때도 있지만, 결국 그 혼자의 시간이라는 것도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누구도 혼자서는 즐겁게 살 수 없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delipot

<아메리카노>로 인기를 얻은 10cm의 첫 앨범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싱글 등으로 나온 노래들도 좋아하고 목소리도 신선해서 눈을 반짝이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첫 곡은 <킹스타>. 무슨 뜻일까?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시작한 이 노래는..놀랍게도 스타킹 페티쉬에 대한 곡이었다. 스타'킹스타'킹. <아메리카노>를 듣고 익히 이 팀의 마초성을 짐작은 했다. 그러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같은 귀여운(!) 곡들도 있었기에 '뭐 생각보다 남자다운 팀이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앨범 첫 곡부터 이런 센 곡을 미는 것을 보니 팀의 정체성이 확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가수가 여자 좋다는 노래를 부르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다만 그것이 귀여운 구석이 엿보였던 남자 가수들에게서 나온 곡이었고, 또 곡이 꽤나 끈적끈적하게 페티쉬 가득한 곡이었기 때문에 놀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솔직하게는, 이 곡으로 인해 10cm에 대한 애정도가 좀 떨어졌다.)

남자가 여자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래하는 곡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2PM의 데뷔곡이 누나의 매력을 점수매기는 <10점 만점에 10점>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여자가 남자에 대한 판타지를 외치는 곡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각근이 불끈불끈 하는 어깨, 넓은 가슴, 단단한 허벅지.. 뭐 남자의 이런 거를 갈망하는 곡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한 곡도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잘나가는 이효리 언니도 남자의 판타지가 되는 쪽을 선택하지 언니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곡이 없다(Mr. Big 정도는 너무 약하고). 다시 말해 한국 대중가수 중 남여를 다 합쳤을 때도 크게 성공했다 볼 수 있는 여자 가수조차도 그녀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는 작품은 없는 것이다. 왜냐면 대중가요 시장에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여자가수라 하더라도 남자들에게 '섹시한' 여자로 선택당하는 쪽이 장사가 더 잘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실제 가요 시장의 소비자는 남자가 더 많은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정말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돈을 많이 쓰는가?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남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비슷하면 비슷했지. 경험하기로도 가수의 콘서트장을 가득 채운 몇만 관객 중에 90% 이상은 여자가 되는 쪽을 더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가요 시장에서 왜 여자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곡들은 없을까? 이 질문의 답이 될만한 몇 가지 추측이 있긴 하다. 구체적인 근거는 없지만.
첫째, 워낙 예전부터 대중문화의 소비자=남자 라는 틀이 만들어져서 생물학적 여자들도 남자의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 팬의 경우처럼. 사실 이건 남자의 시선이라는 틀보다는 동성으로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대상을 선망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여자나 남자나 '원하는 것'의 표상이 별로 차이가 없는 경우가 있다.
둘재, 성적 판타지가 있어도 별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중요하게 욕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정서적 충족, 친밀감, 이해, 공감 뭐 이런 감정적 판타지를 채워주는 것들을 육체적 성적 욕망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이다. 근육 불끈불끈한 짐승남을 좋아하기보다 여리여리한 꽃돌이나 젠틀하고 다정한 남자 가수를 좋아하는 여자 팬들이 더 많다.
그리고 셋째 추측은 여자가 성적으로 욕망하는 바가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이다. '드러내지 못한다'도 몇 가지 층위마다 나타날 것 같다. 우선 여자 자신이 사회적 금기에 갖혀 '난 이런 남자가 좋다'를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욕망이 있어도 그냥 생각만 하거나 친구들과 농담 정도로 만족하고 말거나. 그리고 여자 가수가 사적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도, 이것이 실제 상품으로 나오기는 힘들 수 있다. 음악 생산자들 역시 다른 산업의 생산구조처럼 남성이 대부분의 역할을 차지 하지 않는가. 가수가 이런 곡을 내고 싶다고 해도 과연 '사장님'이 그런 걸 곡으로 써서 상품으로 만들까? "이런 거 안팔려"라며 거절할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약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런 남자가 좋아'라는 곡이 앨범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일단 남자인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이런 것들을 참아내줄까 하는 점이다. 과연 연예부 기자들이나 방송국 종사자들이 이런 곡을 소개나 하고 틀어나 줄까? 보통 여자들에게 섹시하고 착한(혹은 나쁜) 남자를 욕망하라고 선동하는 위험한 곡을?  또한 여자 소비자의 의향도 예측하기 힘들다. '나도 사실 저렇게 생각했어'라며 반기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 어떻게 저런 말을 대놓고'라고 말하거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환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동의의 표현으로 이어지거나 소비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제약 많고 남의 눈치 안 볼 수 없는 사회에서 여자가 솔직하게 성적 판타지를 소비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다. 엄정화나 이효리 같은 여자 가수가 '난 섹시한 남자가 좋아'라는 노래를 부르기에는 이토록 많은 난관이 존재하는 것이다(쓰고보니 참 슬프네-_-. 2PM은 데뷔하면서부터 하는 것들인데).

이제는 여성들의 소비력이 높아져서 남성의 섹시함을 마케팅 수단으로 하는 상품들도 많아지긴 했다. 2PM이 초콜릿 복근을 내놓고 초콜릿 광고를 한다거나, 존 박의 데뷔곡 <I'm your man>에서는 '당신 마음대로 해줘요'라는 도발적인 가사도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근데 이건 아직 다 마케팅, 상술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여성들의 소비를 끌어내기 위해 자극하고 제공하는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여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노래하는 것이다. 뭐 '당당하게'라는 피해자 같은 수식 빼고,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노래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녀 주변의 연예기획사나 작곡가가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여자가 여자의 욕망을 말하는 걸 당연하게 보고 상품으로 만드는 상황은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한국 가요계가 그저 장사판이 아닌, 작가의 예술적 영감을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있는 대중문화로 기능하고자 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욕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작품으로 만드는 사건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 걸 쓰는 동안에 Queen의 곡들을 듣고 있는데 남자가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있으니 너무 좋다. 여자를 발목이나, 스타킹이나, 구두로 사랑하지 말고 사람 그 자체로 사랑해주는 게 힘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delipot

This paper examines the changes brought by digital technologies in the cultural economy of music in Korea. First, I look at how digital technologies forced the reorganization of the music industry.
The dominant technological mediation of the ‘idol star system’ in the late 1990s gave way to industrial
reorganization toward concentration and integration across the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ICTs) industries and the media/entertainment industries. Second, I discuss how digital
technologies impact on the way we experience music. I suggest that digital technologies accelerate
personal and social uses of music and contribute to a diversified music culture. Finally, I discuss how
the digital culture of music is framed by, and is linked with the industrial rearrangement. I suggest
that the ongoing digitalization radically transforms how we conceive the music industry, and renders
the nature of music redefined and contested.
(Lee, Jung-yup(2009) 'Contesting the digital economy and culture: digital technologies and the
transformation of popular music in Korea', Inter-Asia Cultural Studies, 10: 4, 489 — 506)

This article analyses the process of globaliz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a ‘political economy of space’ where the interactions of the processes of capitalist accumulation within contexts of geographic and social space has profound shaping effects upon the nature of politics, economics and society more generally. The argument will show that contemporary globalization has two
dimensions: outward into geographic space, and inward into culture and society. The focus then moves to culture and information technology within the space economy of late capitalism and argues that a crisis of finite geographic space has led to the deepening of the commodificationary processes of capitalist accumulation into the ‘identity-spaces’ of culture and society. For hugely popular ‘cyber-gurus’ such as Howard Rheingold and Myron W. Krueger, the development of information technologies such as the Internet-derived ‘virtual communities’ are spaces where new forms of democracy and ‘being’ can emerge. This article argues that ‘cyberspace’ and ‘virtual communities’ are deeply dystopic and alienated spaces, and cyber-Utopian dreams of other, possible worlds made virtual through information technology are at best naive, when it is realised that the information revolution that evolved from the processes of a particular type of globalization, has conceived and developed
technologies with primarily profit, productivity, surveillance labour-saving and escapism in mind.
(Hassan, Robert(1999) 'GLOBALIZATION: INFORMATION TECHNOLOGY AND CULTURE WITHIN
THE SPACE ECONOMY OF LATE CAPITALISM', Information, Communication & Society, 2: 3, 300 — 317)

영어권의 경우 고차원적인(?) 글쓰기에서는 I를 쓰지 않을 수록 좋다고 한다(들었다). 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주관적으로 '내'가 주장한다고 비춰지기보다는 객관적으로 어떤 증거나 상황을 근거로 들어 객관성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사용법이 다르겠지만 (I heard the voice. The voice was heard.)

위의 글은 한국 학자가 쓴 글이고, 아래 글은 호주에 사는 학자가 쓴 글이다. 모국어가 달라서 그런지 같은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문장을 주로 사용한다. 윗 글은 I로 시작하는 주어(내가 논하려는 것은..)가 전부이고, 아래 글은 '이 글은', '(이 글의) 초점은'처럼 글이나 주장을 주어로 하는 문장으로 이뤄졌다.
보통 한국에서도 학술 논문에는 '나'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대신 '
연구자'라는 말은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편이고. 그럼에도 윗 글에서 I라는 주어가 계속 등장하는 것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영어로 말할 때 편안하고 단순하게 쓸 수 있는 문장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영어 논문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으니(그래서 I 주어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문장의 주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delip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