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로 인기를 얻은 10cm의 첫 앨범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싱글 등으로 나온 노래들도 좋아하고 목소리도 신선해서 눈을 반짝이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첫 곡은 <킹스타>. 무슨 뜻일까?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시작한 이 노래는..놀랍게도 스타킹 페티쉬에 대한 곡이었다. 스타'킹스타'킹. <아메리카노>를 듣고 익히 이 팀의 마초성을 짐작은 했다. 그러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같은 귀여운(!) 곡들도 있었기에 '뭐 생각보다 남자다운 팀이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앨범 첫 곡부터 이런 센 곡을 미는 것을 보니 팀의 정체성이 확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가수가 여자 좋다는 노래를 부르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다만 그것이 귀여운 구석이 엿보였던 남자 가수들에게서 나온 곡이었고, 또 곡이 꽤나 끈적끈적하게 페티쉬 가득한 곡이었기 때문에 놀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솔직하게는, 이 곡으로 인해 10cm에 대한 애정도가 좀 떨어졌다.)
남자가 여자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래하는 곡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2PM의 데뷔곡이 누나의 매력을 점수매기는 <10점 만점에 10점>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여자가 남자에 대한 판타지를 외치는 곡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각근이 불끈불끈 하는 어깨, 넓은 가슴, 단단한 허벅지.. 뭐 남자의 이런 거를 갈망하는 곡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한 곡도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잘나가는 이효리 언니도 남자의 판타지가 되는 쪽을 선택하지 언니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곡이 없다(Mr. Big 정도는 너무 약하고). 다시 말해 한국 대중가수 중 남여를 다 합쳤을 때도 크게 성공했다 볼 수 있는 여자 가수조차도 그녀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는 작품은 없는 것이다. 왜냐면 대중가요 시장에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여자가수라 하더라도 남자들에게 '섹시한' 여자로 선택당하는 쪽이 장사가 더 잘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실제 가요 시장의 소비자는 남자가 더 많은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정말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돈을 많이 쓰는가?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남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비슷하면 비슷했지. 경험하기로도 가수의 콘서트장을 가득 채운 몇만 관객 중에 90% 이상은 여자가 되는 쪽을 더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가요 시장에서 왜 여자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곡들은 없을까? 이 질문의 답이 될만한 몇 가지 추측이 있긴 하다. 구체적인 근거는 없지만.
첫째, 워낙 예전부터 대중문화의 소비자=남자 라는 틀이 만들어져서 생물학적 여자들도 남자의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 팬의 경우처럼. 사실 이건 남자의 시선이라는 틀보다는 동성으로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대상을 선망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여자나 남자나 '원하는 것'의 표상이 별로 차이가 없는 경우가 있다.
둘재, 성적 판타지가 있어도 별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중요하게 욕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정서적 충족, 친밀감, 이해, 공감 뭐 이런 감정적 판타지를 채워주는 것들을 육체적 성적 욕망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이다. 근육 불끈불끈한 짐승남을 좋아하기보다 여리여리한 꽃돌이나 젠틀하고 다정한 남자 가수를 좋아하는 여자 팬들이 더 많다.
그리고 셋째 추측은 여자가 성적으로 욕망하는 바가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이다. '드러내지 못한다'도 몇 가지 층위마다 나타날 것 같다. 우선 여자 자신이 사회적 금기에 갖혀 '난 이런 남자가 좋다'를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욕망이 있어도 그냥 생각만 하거나 친구들과 농담 정도로 만족하고 말거나. 그리고 여자 가수가 사적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도, 이것이 실제 상품으로 나오기는 힘들 수 있다. 음악 생산자들 역시 다른 산업의 생산구조처럼 남성이 대부분의 역할을 차지 하지 않는가. 가수가 이런 곡을 내고 싶다고 해도 과연 '사장님'이 그런 걸 곡으로 써서 상품으로 만들까? "이런 거 안팔려"라며 거절할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약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런 남자가 좋아'라는 곡이 앨범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일단 남자인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이런 것들을 참아내줄까 하는 점이다. 과연 연예부 기자들이나 방송국 종사자들이 이런 곡을 소개나 하고 틀어나 줄까? 보통 여자들에게 섹시하고 착한(혹은 나쁜) 남자를 욕망하라고 선동하는 위험한 곡을? 또한 여자 소비자의 의향도 예측하기 힘들다. '나도 사실 저렇게 생각했어'라며 반기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 어떻게 저런 말을 대놓고'라고 말하거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환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동의의 표현으로 이어지거나 소비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제약 많고 남의 눈치 안 볼 수 없는 사회에서 여자가 솔직하게 성적 판타지를 소비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다. 엄정화나 이효리 같은 여자 가수가 '난 섹시한 남자가 좋아'라는 노래를 부르기에는 이토록 많은 난관이 존재하는 것이다(쓰고보니 참 슬프네-_-. 2PM은 데뷔하면서부터 하는 것들인데).
이제는 여성들의 소비력이 높아져서 남성의 섹시함을 마케팅 수단으로 하는 상품들도 많아지긴 했다. 2PM이 초콜릿 복근을 내놓고 초콜릿 광고를 한다거나, 존 박의 데뷔곡 <I'm your man>에서는 '당신 마음대로 해줘요'라는 도발적인 가사도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근데 이건 아직 다 마케팅, 상술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여성들의 소비를 끌어내기 위해 자극하고 제공하는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여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노래하는 것이다. 뭐 '당당하게'라는 피해자 같은 수식 빼고,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노래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녀 주변의 연예기획사나 작곡가가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여자가 여자의 욕망을 말하는 걸 당연하게 보고 상품으로 만드는 상황은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한국 가요계가 그저 장사판이 아닌, 작가의 예술적 영감을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있는 대중문화로 기능하고자 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욕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작품으로 만드는 사건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 걸 쓰는 동안에 Queen의 곡들을 듣고 있는데 남자가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있으니 너무 좋다. 여자를 발목이나, 스타킹이나, 구두로 사랑하지 말고 사람 그 자체로 사랑해주는 게 힘든가)